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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로마 교회  

예배자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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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날짜 08월 06일 2017년
설 교 자 팔로마한인교회 담임 서명성 목사
설교제목 예배자입니까?
본문말씀 이사야 6 : 1 ~ 8, 로마서 12 : 1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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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팔로마한인교회 담임 서명성 목사


95년에 팔로마한인교회를 개척하고 Calvary Chapel of Escondido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때는 성인 교우들이 이삼십 명 있을 때였습니다. 하루는 설교를 마치고 축도까지 끝났을 때인데, 보통은 입구에 나가서 교우들과 악수를 나눈 후에 성도의 교제를 나눕니다. 그날따라 강대상에서 기도하라는 강한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입구 쪽으로 가는 대신에 강대상 뒤에 있는 의자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데, 마음이 뜨거워지면서 눈물이 나오고 나중에는 엉엉 울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왜 목사가 갑자기 통곡을 했는지 교우들은 어리둥절했을 것입니다. 교회를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에서 저의 부족함이 너무도 절실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격이 밀려왔습니다.  

지금 내가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까 하는 생각을 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예배를 드릴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평가하시고 결과를 알려주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십년 이십년을 예배에 참석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 예배를 드리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자칫하면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사 29:13)는 책망을 하나님으로부터 들을 수 있습니다. 나의 예배를 받으신다는 확신,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믿음,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창 28:16)는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현재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회’라는 주제로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살펴보았고 이번 주는 ‘예배’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전도와 예배
교회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으라”(마 28:18)고 하셨고,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행 1:8)고 하셨으니 선교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넓은 의미에서 선교를 전도에 포함시킨다면 전도와 예배 중에 어떤 것이 우위에 있을까요? 존 스토트 목사님은 세 가지로 전도와 예배를 비교합니다. 첫째, 예배는 하나님에 대한 의무입니다. 그러나 전도는 이웃에 대한 의무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의무가 이웃에 대한 의무를 우선합니다. 둘째, 모든 신자가 예배자입니다. 누구나 복음을 전해야 하지만 엡 4:11에서 전도를 영적 은사 중의 하나로 취급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전도가 아주 자연스럽지만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도가 큰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은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모든 그리스도인이 복음 전도자는 아닙니다. 셋째, 전도는 한시적이지만 예배는 영원합니다. 전도는 열심히 해야 하지만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그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영원토록 계속 될 것입니다. 전도 또는 선교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여 그분께 예배드리기 위함입니다. 예배가 교회의 우선적인 의무라면 우리는 당연히 예배에 최대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시 105:3은 예배에 대하여 귀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 여호와를 구하는 자들은 마음이 즐거울지로다”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은 유일하고 다른 모든 이름과 구별되며 그 이름들 위에 있습니다. “그의 거룩한 이름”에서 이름이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인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의 거룩한 이름을 자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행하신 모든 일들을 찬양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야말로 우리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알아야 하고 실제로 그분께 찬양을 드려야 합니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주시요 구속주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배자 이사야 
신문이나 잡지에 보면 성형수술 광고가 나옵니다. 수술 전과 후의 사진을 비교하면서 달라진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면서 만나기 전과 만난 후의 삶에 전혀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거짓말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경험했으면 그 삶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질이 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을 만나는 거룩한 경험을 한 분들이 많습니다. 그 만남이 하나님과 자기에 대한 생각을 바꾸고 그들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런 분들 중의 한 사람인 이사야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으로부터 선지자의 사명을 받기 전에 이사야는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특히 1절은 예배에 대하여 귀한 교훈을 줍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는 말이 왜 나옵니까? 언제 이 일이 일어났는지 단지 시간을 알려주기 위함이 아닙니다.  웃시야 왕은 악한 왕이었던 아마샤의 아들입니다. 아마샤가 에돔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그들의 신상을 가져와 자기의 신을 삼고 경배하였습니다. 고대에 전쟁은 신들의 대리전이라 생각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긴 후 진 나라의 신상을 가져오면 완전 승리를 거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엘리 제사장 때에 블레셋이 승리를 거둔 후 여호와의 법궤를 빼앗아 간 것이 그런 맥락입니다. 그런데 승리를 거둔 나라에서 패전한 나라의 신을 섬긴다는 것이 있을 수 없는 일인데 아마샤가 그랬습니다. 또한 그는 북 왕국 이스라엘에 선전포고를 하고 승산이 없는 전쟁을 벌이다가, 도리어 침공을 당하였고 성전과 궁궐에 보관하던 무수한 보물을 빼앗기고 사람들을 볼모로 잡혀가게 하였습니다. 결국 반란이 일어나 아마샤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나서 16살에 즉위한 왕이 아마샤의 아들 웃시야입니다. 비록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지만 그는 괜찮은 왕이었습니다. 선지자 스가랴가 웃시야 왕의 곁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재위하는 동안 주변 나라들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위세를 떨치고 광야지대를 개간하여 농산물을 많이 거두었습니다. 그 결과 나라는 매우 강성하게 되었습니다. 문제는 그의 통치후반기였습니다. 역대하 26장을 보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강성하던 웃시야가 하나님을 거역하고 죄를 짓게 됩니다. 성전에 들어가 분향하는 것은 왕이라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웃시야가 그 법도를 무시하고 분향하려고 했습니다. 제사장 아사랴가 왕을 따라 들어가 분향하지 못하게 하자, 웃시야 왕이 화를 내었을 때 그의 이마에 심한 나병이 생겼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를 치시므로 웃시야가 성전에서 쫓겨났다고 합니다. 그가 폐위되지는 않았지만 나병을 인하여 부정하였기에 별궁에서 지내다가 죽었습니다. 1절로 돌아가서 그해가 어떤 해입니까? 웃시야가 죽던 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라를 부강하게 한 웃시야를 그리워했습니다. 웃시야가 떠나자 유다 백성들에게 허탈감이 생겼습니다.  

이사야가 말합니다. 웃시야가 죽었다. 백성들이 섬기던 왕이 죽었다. 그러다가 여호와 하나님을 보았다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웃시야가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별로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사야가 하나님이 성소에 계신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고,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소를 뒤덮었습니다. 하나님 주변에 천사들이 찬양합니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화답하는 웅장한 소리에 성전 문지방 터가 요동합니다. 능력(power)과 위엄(majesty)이 충만합니다. 이사야는 자기가 보고 경험하는 상황을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인간의 단어로 충분히 표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 회개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면서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절) 이사야가 하나님을 대면하고 나니 비로소 자기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사야가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남에게 감추고 싶었던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다음 사람에게 좋은 인상을 주려고 노력도 했을 것입니다. 물론 그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면서 자기에게 숨겨진 곳을 보게 됩니다. “화로다”(woe to me) 이제는 별로 사용하지 않는 고어입니다. 저주받았다(curse), 정죄 받았다(condemn)는 뜻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고 보니 자신을 정죄 받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자기 입에서 나오는 말이나 생각들이 악하다고 고백합니다. 사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부서지고 망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정죄를 받아 마땅한 자들입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신데 우리는 거룩하지 않다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주일에 예배드릴 때 아름다운 소리로 찬양을 하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합니다. 교회당 문을 나가면서 우리가 오늘 예배 드렸다고 합니다. 과연 그럴까요? 자신의 참 모습을 보며 죄를 자복하고 회개하는 순간이 없었다면 참된 예배를 드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회개 없는 예배를 기뻐 받지 않으십니다. 

이사야가 그 다음에 천사를 보았습니다. 천사가 번제단으로 갑니다. 제단에서 이글거리며 타고 있는 숯을 가지고 날아와서 이사야의 입술을 지집니다.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7절)하며 선포합니다. 번제단이 무엇을 상징합니까? 이사야 당시로 보면 그 십자가는 미래에 있을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믿음으로 십자가 앞에 나아갈 때 죄 사함을 받듯이, 하나님이 번제단에 내리는 놀라운 은혜가 있습니다. 예배가 진정으로 느껴질 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때, 우리 죄성을 회개할 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덧입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죄 사함 받은 사람으로 번제단을 떠나게 됩니다. 예배를 드릴 때마다 이런 경험이 필요합니다.‘주께서 의로운 제사와 번제와 온전한 번제를 기뻐하시리니’(시 51:19)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를 드리려면 먼저 죄의 고백과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늘 문이 열리고 기도의 통로가 열리고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 사명을 받습니다
이사야가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 순간까지 이사야는 천사가 찬양하는 것 외에 아무 음성도 듣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회개 없이, 용서 없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회개할 때 비로소 하나님께 들어가는 문이 열립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절) 선교하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보여주십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을 대면하는 경험을 통하여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회개했습니다.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저를 보내소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겠다는 결단을 합니다. 이사야는 웃시야 왕을 섬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영원하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드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상을 섬길 준비가 되었습니다. 예배드릴 때마다 이러한 경험을 해야 합니다. 성전에서만 있을 수 없습니다. 각자 삶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사명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예배는 보냄으로 끝을 맺습니다. 사명자이기 전에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왕이 죽었을 때 세상은 끝이 났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때 이사야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가 예배자로 거듭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사야가 드린 예배를 오늘 우리도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해보겠다고 나서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 진정으로 통회하고 자백하는 경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사명자가 됩니다. 천국은 예배로 충만한 곳입니다. 누구도 떠나고 싶지 않은 곳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지금 드리는 예배는 장차 천국에서 할 것을 연습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영적 예배
어떻게 예배를 드릴 것인가 하는 것보다 “왜”드려야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배의 의미를 바로 알고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배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로마서를 통하여 살펴봅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이 얼마나 풍성한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지, 구원의 목적과 소명이 무엇인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알려줍니다. 로마서에서 실천 편의 시작인 12:1에서 바울은 우리의 삶을 ‘영적 예배’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바울은 믿음으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예배당 안에서만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예배자가 되라고 합니다. ‘자비하심’은 안타까워하시며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는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며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라고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확신이 있을 때 온전한 헌신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짐승을 죽여 번제를 드리면서 예배를 드렸으나, 신약시대 신자들은 자신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성전을 중심으로 제사 드리는 일이 제사장의 주 업무였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왕 같은 거룩한 제사장이 된 신자는 교회당에서나 삶의 현장에서 예배자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거룩해야 합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몸으로 하나님께 산 제사를 드리고자 하는 성도들은 거룩한 생활, 거룩한 몸과 마음을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 경배할 때 우리의 몸이 거룩한 성령의 전으로서 흠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제사로 드리는 제물이 항상 죽어야 하듯이 우리 안에 있는 욕망, 의지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뜻에 전인격적으로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우고 있고,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원하고 자기를 드러내기 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기 의를 드러내려는 섬김에는 세상의 칭찬과 환호는 있을지 몰라도 주님 앞에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한 육체의 갈망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령의 통제를 받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죽고 주님이 사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 예배자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이 다가오는데도 불구하고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며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자기의 뜻을 복종하는 예배자의 모습을 보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하나님 중심의 삶이 예배자의 삶입니다. 바울은 그런 삶을 가리켜 영적 예배라고 부릅니다. ‘영적’으로 번역한 헬라어 ‘로기코스’는 ‘합당한’또는 ‘합리적인’으로 번역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합당하다, 당연하다는 것입니다. 몸을 드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주님께 드려서 주님이 쓰시는 도구가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몸은 결코 육체의 정욕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주님을 섬기는 의의 도구이어야 합니다. 참된 예배는 날마다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주일 뿐 아니라 일주일 내내, 교회당 안에서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의 현장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영적 예배가 됩니다.  

바울은 이어서 권면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신자가 살아가는 ‘이 세대’는 기본적으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이며 하나님을 거스르는 세대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의 세대입니다. 성도는 이 세대의 풍조와 가치관을 따라가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마음”은 헬라어 ‘누스’를 번역한 것으로 정확하게는 마음(heart)이 아니라 생각(mind)를 뜻합니다. 즉 세상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을 성경적인 가치관과 세계관으로 바꾸라는 말입니다.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개역성경에는 분별하라고 명령형인 것 같지만 원어에는 ‘변화를 받아’가 명령형입니다. 2절 하반절을 원문의 의미를 살려 번역한다면 ‘너희가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기 위해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하라’입니다. 여기서 변화는 일반적인 변화를 의미하는 ‘change'가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뜻하는 ‘transformation’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새롭게 변화를 받아‘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해야 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을 비롯한 모든 삶이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지를 끊임없이 확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말은 하나님께 최상의 영광을 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시 29:2). 그동안 어떻게 예배를 드리셨습니까? 예배 중에 시선이 하나님께 온전히 향하고 있었습니까? 예배 중에 이 생각, 저 생각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은 왜 이렇게 설교가 길어 하면서, 예배 빨리 마치고 그 다음 할 일을 인하여 조급해하지 않습니까? 주님이 기뻐하시는 사명자가 되기 원하십니까? 먼저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3-24) 영적 예배의 핵심은 거룩함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은 거룩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어떻게 애쓰십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불의한 재물을 거부했습니까? 불의한 인간관계를 청산했습니까? 삶의 현장에서부터 구별된 헌신의 삶을 사셨습니까? 우선 가능한 것부터 거룩함을 실천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화장실에 갈 힘만 있어도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못된 습관이나 행동은 이제 버려야 합니다. 적어도 예배 시간에 늦지 않아야 합니다. 깨끗하고 단정하게 옷을 입고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예배 방해되지 않도록 cell phone의 소리를 낮추어야 합니다. 간절히 기도하며 뜨겁게 찬양을 불러야 합니다. 이렇듯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예배를 드리기 위해 애를 써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들은 이사야와 같이 하나님을 대면하는 예배자, 바울의 권면과 같이 삶 전체로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 하나님께 통회자복하며 비워진 곳에 은혜로 채움을 받는 예배자,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두는 예배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남기는 귀한 사명자들이 되어 주님 앞에 서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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